안상선 선생님의 큰 마음과 새로운 배움
한 신생아중환자실 의사의 진료실로 바이올린 연주회 초청장이 도착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소녀가 보내온 초청이었다. 오래전, 생사의 경계에서 그가 돌보았던 아기였다.
아내와 함께 찾아간 공연장에서 소녀가 바이올린을 들고 무대로 걸어 나오자 안상선 선생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하던 작은 생명, 상태가 나아지지 않아 온종일 곁에서 치료를 조정하던 시간, 마침내 호전되기 시작했다는 간호사의 전화가 떠올랐다. 그 아이가 자라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고 있었다.

의사로서의 보람을 이야기하며 그가 꺼낸 이 기억에는, 평생 진료에서 지키려 했던 가치가 담겨 있다. 아기를 살려 집으로 보내는 것에 더해, 그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 현재 얼바인에 거주하며 세브란스 남가주 동문회장을 맡고 있는 안상선 선생님의 여정은 그 마음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이어져 왔는지를 보여준다.
더 좋은 의사가 되고 싶었던 청년
1972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3년간 군의관으로 복무한 뒤 1975년 미국에 왔다. 당시 그의 동기 83명 가운데 약 40명이 미국행을 택했다고 회고한다. 미국에서 수련받은 뒤 모교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던 교수들과, 먼저 건너가 자리를 잡은 선배들은 낯선 길을 선택하는 데 큰 용기가 되었다.
그가 바랐던 것은 더 넓은 무대에서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펼치고, 더 좋은 수련을 받아 더 좋은 의사가 되는 일이었다. 경제적인 동기가 가장 앞선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서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려웠지만, 눈앞의 선배들이 그곳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막상 도착한 미국은 기대보다 훨씬 거칠었다. 선배들의 시절과 달리 수련 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워져, 그는 자신의 졸업 기수를 미국행의 ‘막차’라고 표현했다. 한국에서 지원서를 보내 수련 자리를 확보한 동기도 있었지만, 미국에 와서 직접 병원을 찾아다니며 빈자리를 알아봐야 했던 이들도 많았다. 모든 과정을 스스로 헤쳐 나가야 했던 당시를 그는 문화적 충격과 당혹감으로 기억한다.
수련 첫해는 특히 고되었다. 군 복무로 임상 공부에서 떨어져 지낸 3년을 만회하면서 새로운 언어로 소아과를 배워야 했다. 밤새 당직을 서고 다음 날 오후까지 일했다. 직접 검사실에 검체를 가져가고 결과를 받아오는 일도 수련의 일부였다. 긴 근무 끝에 발이 붓던 기억이 아직 남아 있다.
그 시절을 견디게 한 것 가운데 하나는 동료들이었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의사들이 낯선 환경에서 함께 버텼다. 국적이 달라도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사이에는 동료의식이 생겼다.
가장 어린 생명에게 마음이 향하다
처음부터 신생아학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다. 의과대학 본과 3학년 여름, 한센병을 앓았던 이들이 살아가는 자활촌에 의료봉사를 갔던 그는 성형외과 수술로 그들을 도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미국에 온 뒤에는 수련 기회의 현실을 마주하며 진로를 다시 살폈고,자신의 적성에 맞는 소아과를 선택했다.
소아과의 매력은 아이를 둘러싼 가족과의 관계에 있었다. 특히 부모와 신뢰를 쌓는 일이 진료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레지던트 시절 신생아중환자실을 경험하면서,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생명에게 마음이 깊이 움직였다. 말로 자신을 설명할 수도, 아픔을 표현할 수도 없는 아기들이었다. 그는 소아과 수련을 마친 뒤 신생아학 펠로십으로 나아갔다.
뉴욕에서의 수련을 마치고 펜실베이니아에서 약 5년간 신생아 진료를 했다. 전문의 자격을 갖추고 임상 경험을 쌓으면서, 그곳에서 계속 살아갈 것인지 새로운 도전을 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움직인 계기는 한 학술대회였다. 큰 학술대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모교 선배의 모습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익숙했던 자신의 병원과 도시가 달리 보였다. 더 큰 곳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행을 결심할 때 그러했듯, 선배의 모습이 다시 한번 그의 다음 걸음을 이끌었다.

Pain in Tiny Packages
신생아중환자실에서 동료 간호사와 진료하는 안상선 선생님. <Las Vegas Review-Journal> 사진 John Gurzinski
신생아중환자실을 세우는 일
당시 의학 학술지의 구인란에서 네바다의 한 대학병원 공고를 발견했다. 라스베이거스의 University Medical Center였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연간 약 5천 명의 아기가 태어나는 병원이었지만, 자체 신생아중환자실이 없어 아픈 아기를 다른 병원으로 보내야 했다. 교육병원이면서도 신생아 집중치료를 외부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병원을 찾았을 때 그는 자신이 이곳에서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1987년 부임한 뒤 신생아중환자실을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주정부의 기준을 확인하고, 시설과 인력을 갖추고, 치료할 수 있는 아기의 범위를 조금씩 넓혔다. 처음에는 상대적으로 상태가 안정적인 아기부터 돌보았다. 다른 병원으로 보낸 아기들도 그곳 회진에 참석해 경과를 살폈다. 그렇게 준비를 이어가 1991년에는 중증 신생아를 치료하는 레벨 3 신생아중환자실을 갖추었다고 회고한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사람이었다. 간호사를 확보하고 신생아 전문의와 소아과 의사를 모집해야 했다. 여러 세부 전문과와 협력해야 했고, 중환자실 밖의 신생아 진료까지 감당해야 했다. 보험 여부와 관계없이 환자를 받아야 하는 공공병원에서는 재정적인 제약도 늘 고려해야 했다. 좋은 진료를 지속하려면 이를 뒷받침할 운영 체계가 필요했다.
그가 중요하게 여긴 방식은 출생 전부터 함께 준비하는 것이었다. 고위험 임신이 확인되면 산모와 태아의 정보를 공유하고, 신생아 전문의와 산과 전문의, 관련 소아 세부 전문의, 간호팀 등이 모여 치료 계획을 세웠다. 아기가 언제 태어나더라도 누가 무엇을 할지 미리 정해두었다. 이후 진료 성과를 돌아보면서 그는 이러한 준비와 협력이 좋은 결과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President comes to Las Vegas
George H. W. Bush대통령의 신생아 병동 방문 당시 모습. Las Vegas Review-Journal. 사진 Jeff Scheid
교육도 매일의 진료와 함께 이어졌다. 의대생과 소아과·산부인과 전공의들이 그의 중환자실을 거쳐 갔다. 임상 지식에 자신의 경험과 이야기를 더해 가르쳤고, 학생들이 뽑는 우수 임상교수로 여러 차례 선정되기도 했다. 낯선 나라에서 수련을 따라가기 위해 애쓰던 청년은, 이제 다음 세대의 의사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교육자로서의 헌신을 보여주는 수상패. 왼쪽은 1987년 Outstanding Clinical Faculty, 오른쪽은 1991년 졸업생들이 수여한 Outstanding Community Professor 상패.
의사는 빅하트가 있어야 한다
그 긴 시간을 돌아보며 좋은 의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묻자, 그는 ‘빅하트’라는 말을 꺼냈다.
“의사는 빅하트가 있어야 돼.”
지식과 기술을 배우는 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었다. 생명을 향한 열정, 어려움에 놓인 사람을 이해하고 그 어려움을 함께 나누려는 넉넉한 마음. 그는 그 마음이 의사의 태도를 결정한다고 믿는다.
신생아 진료는 의학의 한계를 자주 마주하는 일이기도 했다. 아무 잘못도 없이 일찍 태어나거나 아프게 태어난 아이들을 보면서, 그는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해야 한다는 책임을 느꼈다. 치료의 목표에는 늘 퇴원 이후의 삶이 들어 있었다. 아이가 신체적으로,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자라 자신도 행복하고 사회에도 기여하는 삶을 살기를 바랐다. 바이올린을 들고 무대에 오른 소녀는 그 바람이 한 사람의 삶 속에서 이루어진 모습이었다.
그는 이러한 마음의 바탕에 세브란스에서 배운 ‘플러스 알파’가 있었다고 말한다. 스스로는 평범한 의대생이었다고 기억한다. 학생 시절에는 아침 채플이나 학교의 분위기가 훗날 자신의 진료에 어떤 영향을 줄지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픈 아기의 부모에게 상태를 설명할 때마다, 속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전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모교에서 배운 것이 의학 지식보다 더 넓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젊을 때는 위기를 자신의 판단과 능력으로 헤쳐 왔다고 여겼다. 지금은 그 길에서 자신을 지켜주고 힘을 주신 하나님을 더욱 절실히 느낀다고 한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학생들을 정성껏 가르쳤던 교수들, 자신을 의사로 길러낸 모교에 대한 감사도 세월과 함께 깊어졌다.
은퇴 후 글로 풀어낸 마음
보람이 큰 만큼 신생아중환자실의 책임은 무거웠다. 환자와 가족, 간호사와 동료 의사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판단하고 조율해야 했다. 환자를 위한 최선의 결과를 지키려 애쓰는 동안 자신의 감정은 뒤로 미루는 일이 많았다. 병원을 떠난 뒤 그는 오랫동안 긴장 속에 살아온 자신의 마음이 얼어 있음을 느꼈다.
“내 원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매주 문학 모임에 참여해 시와 수필, 소설을 배우고, 미리 쓴 작품을 나누며 서로의 의견을 듣는다. 글쓰기는 병원에서 다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풀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었다.
은퇴를 결정할 때 그는 의학 밖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 많았다. 음악을 배우고, 글을 쓰고, 미뤄두었던 관심사를 찾아가고 싶었다. 은퇴에 대한 그의 평가는 분명했다. “너무너무 좋았어요.” 그 선택을 잘했다고 거듭 말했다.
가요교실에 다니며 노래를 배웠고, 교회를 통한 해외 의료선교에도 참여했다. 니카라과와 코스타리카, 아이티, 페루 등에서 의료봉사를 하며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실천했다. 이제는 인문학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며, 평생 몸 담았던 의학 바깥의 세상을 알아가는 데에도 관심을 쏟는다. 배워야 할 것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새로운 즐거움이다.
선배에게 받은 용기를 다음 세대로
남가주 동문회장으로서 동문회의 앞날을 묻자, 그는 먼저 선배들에 대한 자부심을 이야기했다. 어려운 시절 미국에 와서 각자의 삶을 일구면서도 모교를 후원하고 학교의 발전을 위해 마음을 쓴 분들이었다. 자신이 받은 용기와 기회가 그들의 노력 위에 있었다는 것을 그는 기억한다.
이제는 후배들이 참여하고 새로운 생각을 더할 수 있는 동문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선배들이 쌓아온 헌신을 이어갈 수 있도록 세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한다는 바람이다. 그 사이에 생긴 단절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동문회가 더 새로운 분위기로 바뀌기를 기대한다.
인터뷰에서는 미국에 오는 동문의 수와 방식이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는 이야기도 오갔다. 예전에는 낯선 나라에서 서로 의지하는 일이 절실했다면, 지금은 한국의 가족과 친구에게 언제든 연락할 수 있다. 선배와 후배 사이에 수련 경험의 차이도 크다. 같은 모교를 졸업했다는 인연을 오늘의 관계로 이어가려면 서로의 상황을 알고 만날 이유를 함께 찾아야 한다.
안상선 선생님의 삶에는 선배를 보고 용기를 얻었던 순간이 두 번 등장한다. 미국행을 결심했을 때, 그리고 익숙한 일터를 떠나 새로운 중환자실을 세우기로 했을 때였다. 그가 걸어온 길을 후배들이 듣는 일에도 그런 가능성이 있다. 낯선 환경에서 버틴 시간, 작은 생명을 위해 동료들과 쌓아올린 진료, 은퇴 후 다시 자기 마음을 찾아간 경험은 각자 다른 시기를 살아가는 동문들에게 오래 생각할 이야기를 건넨다.
지금 그는 얼바인에서 글을 쓰고 새로운 것을 배우며 동문들을 만나고 있다.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지켜온 큰 마음은 그 일상에도이어진다. 자신이 돌본 아기의 훗날을 바라보았던 의사는, 이제 모교 후배들과 동문회의 다음 시간을 함께 바라보고 있다.
선생님의 서재
신생아학 교재와 다양한 관심사의 책들이 함께 놓인 책장. 앞에는 SANG SUN AHN M.D. 명패가 놓여 있다.

